"광주는 왜 싸웠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 1980년 5월, 전남 광주에서 시작된 5·18 민주화운동은 단순한 지역 항쟁이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지켜낸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글에서는 날짜별 사건 전개를 중심으로, 그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목차
📍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의 불씨가 타오르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며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고,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일요일 아침, 광주 도심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날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점이자,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한 민주주의 요구가 분출된 날이었습니다.
⚠️ 주요 사건
-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된 집회 → 도심으로 행진
- 계엄군(공수부대) 투입: 곤봉과 쇠파이프, 체포와 구타
- 시민들의 최초 목격: 충격과 분노 확산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길바닥에 눕혀놓고 마구 때리던 걸 봤어요. 충격이었죠." - 당시 시민 증언
📌 이 날은 단지 시위의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국가 폭력의 실체를 처음 목격했고, 이는 이후 며칠간 이어질 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됩니다.
📍 5월 19~20일: 시위 확산과 계엄군의 폭력
폭력 진압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학생만이 아닌 시민, 상인, 택시 운전사까지 가담하며 시위는 대규모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대화가 아닌 강경 진압을 선택했습니다.
📌 상황 요약
- 도심 전역에서 산발적인 시위 발생
- 계엄군, 시민 무차별 폭행과 체포 감행
- 시민과 택시 기사들의 차량 시위 시작
특히 5월 20일 저녁, 수백 대의 택시와 버스가 시청 앞에 집결해 시위를 지지하며 시가행진을 벌이는 장면은 당시 시민들의 연대 의지를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기록됩니다.
📍 5월 21일: 집단 발포, 시민군의 조직
5월 21일은 5·18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이날 오후, 계엄군은 광주 도청 앞 집회 군중을 향해 집단 발포를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시는 공포와 분노로 뒤덮였습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광주 도심을 방어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엄군은 도심 외곽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는 '시민 자치 기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 5월 22~25일: 시민 자치와 연대의 시간
계엄군의 철수 이후 광주는 4일간의 시민 자치 상태에 들어갑니다. 혼란 속에서도 시민들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고, 병원·식당·교회 등에서 자발적 구조와 구호 활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광주 시민의 민주적 역량과 연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순간이었습니다.
❤️ 시민 자치 사례
- 시민군, 검문소 설치와 치안 유지
- 종교계의 중재 시도 및 피해자 구호
- 병원 의료진의 무료 치료 및 사체 수습
그러나 중앙 정부는 어떠한 협상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는 다시 군사 진압의 명분으로 이어졌습니다.
📍 5월 26~27일: 최후의 항전과 참혹한 진압
5월 26일, 계엄군은 광주 재진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시민군은 도청에 집결하여 마지막 결전을 준비합니다. 5월 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도청을 전면 진압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 최후 항전의 기록
- 도청 내 마지막 방송: "우리는 최후까지 싸우겠다!"
- 새벽 4시, 계엄군 특공대 진입
- 수십 명 현장에서 사살, 주요 시민군 지도부 체포
그렇게 10일간의 광주의 저항은 막을 내렸지만, 민주주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국적 민주화 열망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